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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당_임영신의 자서전 "나의 40년 투쟁사" 18. 죽음전의 고요(2)
2011-01-0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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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장 죽음전의 고요(2)

 

나는 이 정치 지도자가 상공부 내에 정보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오늘날까지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부하가 나에게 신체적인 해를 끼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런 의도 없이 단순하게 행한 일 때문에 그들은 나의 몰락을 가져오는 데 성공하였다.

3월 26일은 대통령의 생일이었다. 나는 생일 축하와 함께 한국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계획했다. 이때 한국의 산과 숲은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40년 동안 일본인들은 그들 마음대로 산림을 무자비하게 훼손시켰고 그로 인해 매년 무서운 홍수가 났다. 따라서 대통령도 산림 조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민의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대통령 산하 산림조성 기금 설립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자신했다. 내가 그 계획을 발표하자 상공부 직원들은 크게 호응했다. 그들은 즉시 헌금을 모으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 시간 내로 수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상기되었다. 비서인 황영모 씨는 이와 같은 열정적인 반응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이틀 뒤에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즉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었다. 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비서에 의해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대통령은 책상에서 무엇을 쓰고 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앉으라고만 하더니 수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다음에 그는, “영신이, 나는 영신이에 대한 좋지 못한 소식을 들었소. 영신이 공장주들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는 것이오.” “제가요?” “이것은 중대한 고발이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 “영신이,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잘 알고 있소. 나는 항상 영신 이를 정직하다고 생각해 왔소. 헌데 지금은 무어라고 말할 바를 모르겠소.” 한동안 나는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나는 기억해냈다. 산림조성 기금,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웃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돈을 받았는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니고 상공부가 받았습니다. 수 일전 국장들과 대통령께 생일선물로 드리겠다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산림조성을 위한 기금으로.......,” “누가 돈을 가지고 있소?” “비서 황영모입니다.” “즉시 돈을 돌려주시오, 나는 영신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요행을 바랄 수는 없소. 국민들은 이 돈이 나를 위하여, 혹은 영신을 위하여 사사롭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오. 우리는 우리의 투쟁에 있어서 어느 때보다도 지금 조심해야만 하오.” 나는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에 대해 한국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커다란 존경심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소아마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억하기 위하여 미국에서도 이와 같은 기금이 설립되었다는 데 대해 얘기했다. 산의 풍화 작용과 매년 일어나는 홍수 예방이 시급하다는 것도 역설했으나 대통령은 듣지 않았다.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돌려주시오. 영신은 먼저 나와 상의했어야 했어요. 영신은 중대한 과오를 범했소.”

그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갑자기 내가 늙고, 무기력하다고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았다. 어떤 생각을 가지면 그 계획을 시작하고, 그것을 실제로 완성할 수가 있었다. 무에서 사범학교와 대학을 건설 한 것, 미국에 가서 한국을 위하여 싸운 것, 북한과 교역을 끊은 일, 이제 갑자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나의 창문은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의 생각은, 그 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그들의 감정적, 지적 반응에 적합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혼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생일 카드를 보냈다. 그리고 황영모 씨는 돈을 다 돌려보냈다. 수표로 천만 원, 약 만 불, 사건은 그것으로서 끝났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상공부 내에는 상공부를 장악하려는 집단을 위한 정보원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당을 조직할 수 있을 만큼의 수도 못 되었는데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힘으로 만 이 나라를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릇된, 너무나도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교활하고 강하였다.

4월 초에 몇 개의 일간지들은 내가 나의 정치 생명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뜻의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나는 사업가들로부터 3천만 원을 받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거기에는 산림조성 기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돈을 돌려주었다는 말도 없었으며, 3천만이라는 숫자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 국회에서는 조사위원회 위원장 정인보 씨가 주축이 되어 상공부를‘숙정’하라고 요구했다.

사무실로 대통령의 전갈이 왔다. 나는 경무대로 갔다. 신문들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돌아 앉아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돌아앉자, 나는 그가 아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훌훌 불고 있었다. 그 습관은 1901년, 일본인들에 의해 투옥당하고, 손톱 밑을 성냥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한 후 얻은 습관이었다. “영신이!”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영신이는 사임해야 하오. 영신이가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압력이 나에게 가해지고 있소.” 나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너무나 무거운 압력! 너무나 무거운 압력! “지금 사임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사표를 내면 이 비난의 소리들은 가라앉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임영신이 사기꾼이며, 검찰의 공소가 무서워서 사임했다고 영원히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싸워야지요. 제가 가서 정인보 씨를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제시하던지 아니면 비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말하겠습니다. ”영신은 사임 하지 않고도 견딜 수가 있겠소? 사임 후에 내각의 일원이 될 수 있소? 나는 영신에게 쉬운 일, 예를 들면 무임소 장관직을 줄 수 있소. 그러면 영신은 불명예스럽지는 않을 것이오.“ ”제가 사실을 증명했을 때 사임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내가 정인보 씨를 만나러가자 그는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여태 무엇을 읽고 있었는지 아시오?“ 하고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당신이 1919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투옥될 당시, 그들이 당신에게 가한 고문에 대해서 읽고 울 뻔 하였소.“ ”정인보 씨, 나는 듣기 좋은 말을 하러 온 것은 아니오.“ 그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 같은 일들이 실제로 당신에게 일어났었소?“ 하고 그는 물었다. ”정인보 씨, 당신은 나에 대해 사실이 아닌 말을 했습니다.“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당신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난 당신 뺨이라도 칠 것이오.“ ”화내지 마시오.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3천만 원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요?“ ”상공부의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름은?“ ”나는 말할 수 없소. 그건 분별없는 일이오.“ ”그의 이름을 대시오.“ ”그럴 수는 없소.” “비서인가요. 아니면 차관이오?”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소. 상공부에 있는 고위 관리요. 나도 그 고발을 듣고 놀랐소. 그러나 그 고발을 조사하는 것이 나의 임무지요.” “확인도 하기 전에 신문에 내는 것이 조사입니까?" ”국민은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소.“ ”모든 것이라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인보 씨, 악의에 찬 소문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뻔뻔스러운 당신에게 경고 하겠소. 만일 당신이 내가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조심하시오. 나는 당신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충고하는데 증거를 제시하십시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은 즉시 한국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다음 수개월 동안 나는 나의 명예를 위해서 싸웠다. 그들은 부정을 통해서 얻은 돈이 국회의원 선거에 쓰였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드디어 고등 법원이 그 사건을 떠맡았으며, 나의 주장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 고발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정인보 씨를 견책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1949년 6월 8일, 나는 명예를 회복하고 정무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6월 9일에 나는 명수대로 돌아왔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무척이나 바쁘게 살아 왔다. 유엔에서, 상공부에서, 끊임없이 압력을 받았고, 그 일에 쫓겼다. 이제 그 추적은 살아져 버렸다. 내게는 국회의원으로서, 중앙대학교의 학장으로서의 임무도 있었다. 학교는 나 없이도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놓았으나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주전자는 따스했지만 물은 더 이상 끓지 않았고 차는 미지근했다. 그것이 그때의 나의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대학 총장이 되는 일에 전념하리라 생각했다. 지금도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편안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학교를 관리하며, 교과 활동을 감독하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거나, 책을 살 자금에 대해서 걱정하는 등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부르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한국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되돌아와 국회의사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회현동에 집을 사 정착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 년 동안의 한국인의 삶은 절반의 평화와 절반의 전쟁불안 속의 나날이었다. 무엇을 할 수도 무엇을 안 할 수도 없는 좌불안석이었다. 예측 할 수없는 미래 때문에 확실한 신념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 소련, 중국이 한국의 미래를 거머쥐고 있었다. 우리는 줄을 이리저리 잡아 다니며 움직이지만 그 줄이 워싱턴 D.C., 모스코, 북경에 달려있는 꼭두각시였다. 우리는 개미처럼 개미의 뚝 과 개미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자유는 가졌지만 어느 순간에 거인의 발자국이 우리를 밟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 년 동안의 한국 생활은 하나의 잔인한 경험이었다. 우리들은 한 자리에 앉아 5년이나 10년 걸려서 완성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 계획을 정열적으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이 옆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끝장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만 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회의에 젖어들었다. 5년이나 10년이 걸리는 계획? 어떻게 그런 계획을 세울 수가 있는가? 아마도 세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에 생각하면 어떻게 세울 수가 있겠는가? 부모는 어린자식을 바라보며, 선생은 학생을 바라보며, 건축가는 그의 집을 바라보며, 사업가는 그의 공장을 바라보며, 상인은 그의 창고를 바라보며, 정부의 장관은 그의 일을 바라보여, 대통령은 그의 나라를 바라본다! 이들 하나하나는 이 숙명적인 기간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던가!

회현동 집은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조그마한 성지가 되었다. 정부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나에게로 왔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 젊은 지도자들, 노동운동가, 교육자, 사업가, 학자, 거지, 노동자, 젊은 학생들도 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을 원했다. 그들의 감정과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농민은 쌀값이 싸다고 불평하기도 했고, 노동자들은 쌀값이 너무 비싸다고 투덜댔다. 정부가 학교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교육자가 있는 반면 세금이 너무 높다고 불평하는 사업가도 있었다. 나는 남한에 살고 있는 2천만의 사람 중에서 행복하거나 혹은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10만 명이 될까 의심스러웠다. 불안감이 우리 모두를 침식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유화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누가 져야하는가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결국에 가서 북한이 공격을 가해 왔지만 그러나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한국에는 어떤 행동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겨울은 매일 어둡고 음산했다. 1950년 정월 13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지만, 여느 때나 다름없이 스산한 겨울날이었다. 나는 5시 30분에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었다. 나는 이런 저런 탄원을 하기위하여 나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매일 서울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당시 관공서 사람들의 집 문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10시쯤 집을 나와 차고 깨끗한 공기를 가르며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회의실에서는 의원들이 모여 걱정스런 말투로 ‘애치슨(Acheson)’이라는 이름을 들먹이고 있었다. 그것은 12일에 워싱턴 기자 클럽에서 있었던 연설에 관한 이야기였다. 남자들이 둘러있는 곳에 여자가 쉽사리 끼어들기는 거북 하였으므로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우려야 했다. 그들의 대화가 토막토막, 혹은 문장으로 귓전을 스쳤다.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이라는 연의 꼬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위험하오. 결국에 가서 우리들 군대만을 가지고 침략을 방지할 수는 없소.” 나는 의사당 밖으로 나와 윤치영 부의장 사무실로 갔다. 그의 방은 조그맣고 깨끗했다. 그림도 걸려 있지 않는 새하얀 벽돌이 냉랭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고요했으나 창백했다. “애치슨 장관이 뭐라고 했소?”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 무더기에서 연합통신에서 온 뉴스 철을 뽑아주었다. “우리들은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싸울 것이지만,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 거기에는 빠진 것이 있었다. 나는 연설문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한가를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국의 AP(Associated Press)사와 UP(United Press)사에 이 기사를 확인했다고 말해 주었다.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 한국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우리는 잘 무장된 이북 군대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에서 한국의 입장에 대한 대가는 ECA 화물로써 완전히 끝났다는 것일까? 2천만 불이 38선으로 분단되어 고통 받는 한국에 지불된다는 말인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누구인데? 윤씨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단념의 빛이 비쳤다. 우리는 의사당으로 걸어가면서 이제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국회 회의실에서 애치슨 장관의 연설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 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수개월 동안 ‘미국과 멍에’를 벗어버리라고 주장해온 의원들까지도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적대시하는 두 명의 경쟁자로부터 자선을 비는 가엾은 탄원자들이었다. 우리들이 선택한 강대국은 우리들이 몰락하도록 버려둔 반면에, 다른 강대국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적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끝까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점심 때 윤 씨는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우리는 상황을 토의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한국은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우리는 우리나라의 국방이 어떠한 제3자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에 즐거워해야만 했다. 우리는 반공주의자로서 중공과 소련에 지리적으로 가까이 붙은 우릴 한탄하기도 했다. 현실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기위하여 어떠한 일을 한다할 지라도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윤 씨와 나는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해보았다. 애치슨 선언문은 38선 국경에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을 때 북한과 그 동맹 국가들이 어떤 행동으로 나오는가를 알고자 하는 하나의 시험이고, 어떤 뜻에서 그 선언문은 공산주의자들의 힘과 과감성을 시험하는 것이며, 그들이 감히 공격할 것인가를 알기위한 시험 이라고 말이다. 또 우리가 선택된 이유는 미국의 고위 군사 전략가들이 서방의 어느 국가도 소련의 공격에 대하여 한국을 방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데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국을 하나의 시험 대상으로 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보면 아무런 손실이 없는 것 같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 있어서의 전쟁이 마치 수돗물처럼 잠갔다 열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실이 어떻든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 자신의 공포감이 다른 사람에게 옮아서 낭패한 지경으로 이르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느꼈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올 것 같은 공격을 막기 위해서 주위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애치슨 장관의 연설을 북한이 알게 된 이상, 군사적 공격은 필연적인 것 같이 보였다.

수일 뒤에 한 군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한국군 참모부에 소속된 고급 장교였다. 그는 몹시 불안해 보였는데, 목소리를 낮추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했다. “한국군 참모장 채병덕이 북한으로 밀사를 보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왜?” “그는 암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장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애치슨의 연설이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야기 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을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대가를 지불하고서 말입니다.” 너무 놀라운 일이었으나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는 약간 미심쩍어 하면서도 국방 장관에게 보냈다. 국방 장관은 내가 그런 말을 믿는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그 장교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의 이름대기를 거절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얘기는 다시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유달리 추운 밤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는 바를 천장에 대고 소리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1950년도에 한국은 그럴 장소가 못되었다. 만일 내가 아는 바를 떠들기라도 한다면 나를 쏠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했다.

며칠 뒤 나는 여섯 사람을 집으로 불렀다. 그 중 네 명은 형사였고 두 사람은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용감하면서도 특별한 냉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질 일에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어떤 위험한 것이리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중 한사람이 능청맞게 대답했다. ”평양으로 소풍을 갈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런 것은 없다.“ 하고 나는 잘라 말했다. 그리고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소.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전쟁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소. 그런데도 우리는 북한의 계획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소. 국방부는 이 불안 상태가 계속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정보가 없이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소. 만일 북한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대책을 세울 기회는 아직 있소. 그러니 정보를 수집하러 북한으로 갈 수가 있겠소?” 그들은 서로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잠시 후 그들은 나의 방문을 두들겼다.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그들 중 대부분이 그 일을 완수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북한으로 가기 위한 준비는 위험한 것이었다. 남한 곳곳에 스파이가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조심을 해야 했으므로 최대한 비밀리에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위험 외에 다른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군이었다. 그들은 내가 군사 일에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만일 이 계획이 미리 알려진다면 시행하기도 전에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여섯 명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서울을 떠나 있으라고 말한 후 자금 준비를 시작했다.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윤치영 씨에게 가서 만원을 얻고, 예금 중에서 30만원, 그리고 약간의 보석을 잡혀 마련할 수 있었다. 돈은 그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다음은 통행증을 얻는 일이었다. 김정이 대위로부터 한국군 지역을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압수된 북한 지폐와 위조된 공산당 당원 증명서, 소련제 권총, 그리고 페니실린도 구했다. 페니실린은 정보와 교환할 수 있는 뇌물로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전심전력을 다한 2주일의 준비 끝에 용감한 여섯 명의 청년은 출발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은 초승달이 되기를 기다려 출발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집은 텅 비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체취가 집안에 가득했다.

구 후 나는 예상할 수도 없는 그들의 활동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바쁘게 일에 열중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과연 이들을 죽음과 대결하도록 보낼 권리가 있었는가를 자주 생각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권리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 일을 해야만 했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나를 괴롭혔다. 나의 생활은 달력과의 무의미한 경쟁이 되어버렸다. 한국은 거대한 감옥의 사형집행 실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사형 집행날짜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고문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었다. 길가에서 웃는 사람을 보아도 그들이 곳 직면하게 될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 우울해졌다.

그 시기에 한국인들은 두 가지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얼마 안가서 북한이 쳐 내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국방력에 우리를 연결시키고 있던 줄이 끊어지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방위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38선에서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 모든 괴로운 시기를 통해서 우리는 국제연합이 북한을 설득하여 어떤 협상을 하리라고 희망하고, 기도하며, 믿고자 했다. 한국정부는 스스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다른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미국은 우리의 점점 커가는 재정 적자가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는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면서 재정의 수지 균형을 경고했다.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필요했지만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연합이 협상을 강요할 것을 희망했지만, 그 결과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선거를 원했지만 조직된 공산주의자들의 전술과 극렬분자들의 테러 때문에 선거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 모든 복잡한 문제에 필연적인 해답이 하나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에서 우리의 패배는 확실했다.

정부는 남한에서 점점 커가는 공산 세력에 대해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악화된 경제적 형편은 전반적인 불안을 조성하였고, 공산세력의 침투는 그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소위 중간파들이 이 세력과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아침, 14명의 신문기자들이 간첩행위자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작가들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일시에 민주주의를 선전하면서 간첩을 박멸하고, 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기관에서 불순분자들을 색출해냈다. 상황은 혼돈,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으나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각 형무소에는 공산주의자와 좌익 동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 마당에는 사형 집행의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렇다고 처형된 사람들 모두가 다 간첩은 아니었다. 무죄인 사람, 멍청한 사람, 그리고 배신을 당한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그 중 나의 친한 친구였던 김 교수도 있었다. 그는 마지막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이 더 이상 서로를 죽이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평화가 올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가르치십시오. 학자들을 보호하십시오. 이대로 간다면 한국에는 얼마 안가서 그 들이 별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을 찬양하고 한국을 저주했는데, 그는 총살 대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 생에서 후회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쪼록 학자들을 더 이상 죽이지 마십시오. 한국은 장래를 위하여 그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그의 체포를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랬더라면 그의 사면을 위해 애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김 교수가 배반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일제 시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한국사가 전공이었다. 그는 역사연구를 통해 일본에 도전한 사람이었다. 그는 암살된 사회주의 지도자 여운형의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는 배신자가 아니라 멍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남북이 통일되는 것을 보고 싶어 했고 그래서 어떤 공산주의 선전에 동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45년에는 한국의 문제가 훨씬 더 단순했을 것이다. 그때 선거를 치렀더라면 통일과 자유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이 모스크바·얄타· 그리고 카이로 선언의 약속을 포기했을 무렵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북한은 군대를 가지게 되었고, 비공산주의자들은 남한으로 도망을 쳤거나, 공포에 질려 통일된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혹은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무렵까지도 가느다란 기회는 있어 보였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소비되는 수십억의 돈은 한국의 산업을 건설하고, 무역을 활성화시키며, 방위군을 조직·훈련하는 데 보다 유익하게 쓰일 수 있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하나의 공통된 교훈을 준다. 그것은 정책이 일단 시행되면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빨리 추진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상황이 달라져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할 때까지 서서히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따라서 성공할 수 없었다.

2월 27일 새벽, 북한으로 간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이 돌아왔다. 아침햇살이 비치기 바로 전, 그들은 내 집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문을 여셔요, 우린 다 죽어갑니다.” 그들은 여섯 사람과 같이 있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인민군의 전선을 뚫는 것을 도왔으며, 같이 정보를 수집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두 사람을 보자 나는 눈을 의심했다. 한 달 전 강인한 젊은 남자들이었던 그들은 깊은 주름이 파이고,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쇠약한 거지와 같았다. 따뜻한 차를 들며 그들은 출발 시부터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했다. “선생님 친구인 일군단의 김 서관 대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38선을 넘었습니다. 공산군의 경비병을 피해 산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다음날 아침 두 명이 탐색을 나갔는데 곧 총소리가 들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은 저회들은 각각 행동하기로 하고, 해주, 원산, 신의주, 평양으로 헤어졌습니다. 각자 그곳에 친척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3주일 내지 4주일 안에 서울에 돌아올 것을 약속했지요.” “저희들이 가지고 간 신원증명서가 목적지까지 가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물론 살아남은 저희 둘에게 만요.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희는 북쪽 어느 곳에 군대가 집결되어 있는지 알았습니다. 보병을 비롯해 탱크,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38선 가까이 있는 마을들은 군인들을 위해 비워있었습니다. 이미 북한은 우리를 공격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참모총장인 채병덕이 배신자라는 정보도 확실합니다. 북한에서 그의 비밀 사자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온 정보를 정리했고, 나는 그것을 모아서 대통령에게 뛰어갔다.

내가 그 비밀 정찰대의 이야기를 꺼내자 대통령은 크게 놀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영신이 자네는 내가 어떻게 이 모든 사실을 믿으리라고 기대 하는가? 만일 자네 사람들이 38선을 넘은 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들이 말한 바를 믿을 수 있겠는가? 자네는 참모 총장의 배신과 북한의 남침을 말하지만 군정보부에서는 전혀 이런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북한이 얼마나 강하며,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자네는 군사 전문가도 아니고, 따라서 이 정보는 믿을 수가 없어.”

수일 뒤 나는 반도 호텔로 미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무초(Muccio) 대사에게 그 정보를 이야기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사는 그의 영역 밖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다음날 나는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자네는 미국인들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 무초 대사의 말을 들은 신 국방 장관이 무척 화를 내고 있소.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돼.” 나는 1시간 동안 나의 주장을 다시 말했으나 대통령은 듣지 않았다. 군대와 군사문제는 국방장관의 소관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알았다. 나는 정부 규칙이나 행정체제에 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말을 해야만 한다. 한국의 장래에 관한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회는 고된 한 달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들은 미 국무성이 만족할 만한 예산 편성을 하기 위해 고심했다. 애치슨 장관은 우리의 적자 예산에 공식적인 불만을 표해왔다. 그러나 수지 균등의 예산을 위해서는 세금을 많이 올려야 했으므로 국민들의 항의가 있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국민들이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에 처해서도 정부의 지도를 따르는 것을 보다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세금 인상은 워싱턴의 명령이었다. 애치슨 장관은 원조를 끊을 것이라 경고하였고 미국의 원조 없이는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이런 일들로 우리들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선거 운동에 나설 수 없었고, 대통령은 선거를 미루려 했다. 그러나 미 국무성은 헌법에 명시된 날짜에 선거를 치루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것은 소란한 한 달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에 왈가왈부하는 논쟁도 있었다. 예산 편성에 대한 불만으로 의원들은 대통령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정족수미달로 부결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는 내가 태어난 금산이 있는 도에서 입후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랜만에 나는 금산에 갔다. 마을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이전처럼 흙으로 지은 조그만 집들, 포장되지 않은 도로. 도착한지 처음 며칠은 가족들이 살던 집에서 지난 일들을 추억하며 한가하게 보냈다. 이미 가족들은 그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형제자매들은 각각 한국 여러 곳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과거를 회상할 시간은 없었다. 나의 상대는 13명의 남자였고, 그들 대부분은 잘 알려져 있는 그 지방 정치인들이었다. 선거 운동은 아주 신랄하였다. 증오와 폭행도 있었다. 입후보한 사람들은 마치 선거에 생명이 달려 있는 것처럼 싸웠다. 개표가 되고 마침내 나는 당선이 되었다.

나의 생애는 이제 하나의 완전한 원이 되었다. 40년 전에 여성의 힘을 무시하는 조롱을 들으면서 고향을 떠난 어린 소녀가 이제 입법부에서 그 고향을 대표하게 된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오자 미국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변호사인 막스 델손(Max Delson)이었다. 그는 이혼한 남편이 애니 머너 파이퍼(Annie Merner Pfeiffer) 재단으로부터 나오는 자금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미국으로 올 것을 권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학교 문제도 문제려니와 그보다도 더 큰 것은 북한의 의도를 미국에 빨리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6월 22일, 나는 서울을 떠났다. 그것이 전쟁으로 파괴되지 않은 서울을 보는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6월 23일, 나는 라과디아 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친구들의 환영을 받았다. 나는 그 주말 동안 쉬기 위해 프린스 조지(Prince-George)호텔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