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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당_임영신의 자서전 "나의 40년 투쟁사" 16. 커가는 공산주의의 그림자
2010-12-0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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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커가는 공산주의의 그림자

 

1945년 8월 어느 날, 소련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 일본인들의 종말을 뜻했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고 젊고 정력적인 붉은 군대 앞에서 물러났다.

서울에서는 미군을 열심히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오키나와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미군이 과연 한국으로 올 것이냐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일본인들은 무엇인가 바빴다. 그들은 전진해 오는 소련군에게는 별 주의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정부의 평화로운 장래를 소란케 하기 위하여 계획한 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공산당 지도자들을 불러들여서 그들에게 일본인 상사와 공장들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조폐공장을 공산당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여 수십억 엔의 새로 찍은 돈이 공산당의 금고로 들어갔다. 공장들을 떠맡은 공산당의 새 지배인들은 생산을 증가시켰다. 약간의 재건운동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을 혹은 공산당을 혹은 여운형 씨의 준(準) 정부를 위하여 일하는 건지 확실치가 않았다. 사람들은 다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을 희망했다.

8월 말경, 최초의 피난민들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은 교회지도자, 사업가, 지주들, 그리고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지치고 위축되어 놀란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붉은 군대로부터 도망해 온 것이었다. 붉은 군대는 친구로서 들어와 주인으로 변하여 있었다. 그들, 소위 ‘해방군’들은 물건을 빼앗아 가고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하였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투옥되었다. 공산주의 지하운동가들과 만주와 시베리아로부터 돌아온 망명가들이 행정직에 앉혀졌다. 피난민들은 천만 가지 얘기들을 했는데 그 얘기들은 다 공포심을 자아냈다.

붉은 군대가 38선에서 멈추고, 더 이상 전진을 하지 않자 우리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여운형 씨는 북한 사람들과 통신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잠깐 동안은 그가 모든 한국 정당들을 참여시킨 단일 정부를 조직할 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그는 이 박사를 대통령으로 지명할 것이라 말했다. 그 중요한 때에 미군 비행기 한 대가 서울에 나타났고, 삐라가 뿌려졌다. 그것은 웨드마이어 장군의 사령부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서 한국에 갈 것이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시오.” 그 메시지는 또 일본인에 대하여 한국인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길모퉁이에서는 열띤 토론이 일어났다. 그것이 일본 경찰을 오게 하였는데 때때로 길가에서 행하여지는 토론들이 너무나 열기를 띠어 다가온 일본 경찰을 군중들이 밀쳐 버리기도 하였다. 그런 행동 밑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지도자의 출현이었다. 우리는 필요 없이 피를 흘리기를 싫어했다. 상황이 그와 같이 위급하게 되었을 때 나는 여 씨한테 가서 나의 걱정을 설명하고 이 박사가 돌아올 때까지 중요한 정부의 시책을 실천하지 말기를 부탁했다. 그는 나에게 동의했다.

우리들은 9월 초순, 미군이 5일이나 6일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한국 지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교만하게 행동했다. 나는 한 일본인 트럭이 길가는 세 명의 젊은이들을 치어 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피를 흘리면서 길 위에 쓰러지자 운전병은 뒤돌아보았다. 한국인이, “너희가 그들을 죽였다.” 하고 소리쳤는데도 운전병은 계속 차를 몰고 달렸다. 그와 같은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참았다. 미국인들이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 단체에서는 미군을 위한 거대한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미국 국기를 만들거나 소지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미군이 도착할 때 길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죽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본인들이 이와 같은 명령들을 시행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우리들은 일본인 자신들이 미국인들을 환영하기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9월 5일, 우리들의 여성 민주당은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꽃들을 사서 미국 장군들에게 주기 위하여 세 개의 거대한 화환을 만들었다. 그날 밤에는 거의 잠을 잘 시간이 없었다. 나는 경기고등학교 옆에 있는 윤 박사 집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세 대의 택시에 분승하여 우리들은 서울의 성문으로 향하였다. 우리들이 1, 2백 미터쯤 갔을 때,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후퇴하여 윤 박사 집으로 되돌아갔다. 6일 하루 종일 우리들은 총소리를 들었으며, 나중에는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온 최초의 미국 차량의 소리를 들었다.

7일 신문에는 미국인들이 한국에 무엇을 가지고 오는가를 생각게 하는 보도가 있었다. 미군 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장군을 환영하려고 한 세 명의 한국인들이 살해되었고, 더 많은 한국인들은 부상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하지 장군의 앞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본인들을 벌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일본인들은 ‘정상적인 경찰 임무’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들은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하지장군의 사령부에서는 남한에 있는 일본인 병사들은 헌병으로서 사용하며, 그들에게 견장이 주어졌다는 것을 발표했다. 일본인들은 정부에서 떠나지도 않을 것이며 공장이나 공공기관의 행정직에서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미군에게 한국 사람들은 미군을 환영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대량 학살할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인 및 일본인 현병에 의하여 하지장군의 사령부에 접근 못하도록 제지된 것이었다. 몇몇 한국인들만이 미군정에 접근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협력자였다.

미군정은 정덕수 라는 사람을 서울에 있는 한국전기 회사의 사장으로 앉혔다. 일본의 점령 하에서 여자보육사범학교의 학장으로 있던 그는 반일 교사를 비밀경찰에 보고함으로써 일본인들과 협조하였다. 죽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증언한다. 또 성금산과 이숙정은 각각 덕성실업학교와 가정고등학교의 교장으로서 그들의 여학생들을 일본화 시키려고 크게 노력했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이들 두 학교의 교사들은 그 배신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파업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교육국은 그들을 그대로 두고 애국적 교사들을 파면하였다.

박흥식은 일본인들과 거래함으로써 부자가 되었다. 한번은 일본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도교로 가기도 했다. 전쟁 동안 그는 서울에 비행기 공장을 설립하고, 종로에서 제일 큰 화신백화점의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 점령 하에서는 암거래로 문제를 일으켜 여러 번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는 미군정에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고용되어서 한국인 애국자들을 고문한 경찰이 미군정 경찰에 그대로 남아서 이제는 미군 정부의 감독 하에 일을 했다.

이와 같이 미군 정부를 위하여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은 무척 않았다. 미군정이 시작된 처음 몇 주간은 명랑한 것이 못 되었다. 미군들은 일본인들을 영구적인 하인으로 삼는 것 같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크게 효과적으로 선전했다. 그들은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모든 일본인 공장과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인과 그들의 한국인 협조자들을 수용소로 보냈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서울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미국인들에 대한 분노의 시위들이 일어나자, 나는 하지 장군이나 그의 보좌관을 만날 결심을 했다. 나는 영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그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인 장진섭의 소유인 반도 호텔로 갔다. 많은 미국인 장교들이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자하는가를 장에게 설명했고, 그는 한 공군 대위에게 소개하였다. 그로부터 나는 고위 군정 관리들이 살고 있는 조선 호텔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증명서를 얻었다.

다음날 나는 하지 장군의 보좌관을 대면할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미군정의 한 멤버와 만난 한국지하운동의 최초의 대표가 된 것이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으나 그가 소령이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그는 피로한 것 같았고, 그의 방에는 서류들이 널려 있었는데, 그것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대하고 방문목적을 물었다. 내가 그에게 미군들이 일본인들과의 면밀한 관계로 인해서 초래되는 여러 가지 혼란을 이야기하자, 그는 양손을 치켜들고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나무랄 수 없어요. 누구도 이 혼란 상황에 대해서 우리들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한국에 가도록 명령을 받은 우리는 오키나와에서의 전투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각건대 이 점령군을 통틀어서 한국어 통역관으로 일한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소. 나는 오늘에야 삼천만에 가까운 한국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소. 이 나라가 그렇게 크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소. 삼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민간 행정에 관한 것을 전혀 모르는 우리 전투군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이것은 무모한 짓이요. 워싱턴의 누군가가 큰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그는 내가 말한 모든 말들을 하지 장군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진정한 한국인을 만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이 만남에서 어떤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마도 나의 호소에 답해서인지 하지 장군은 그가 모든 한국인 정당과 사회단체의 지도자들과 만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한국으로부터 기사거리를 찾고 있던 기자들에게는 즐거운 나날을 갖게 하였다.

미군 정부에 항의하는 혼란 속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나더니, 수천 명의 정치지도자들이 하지 장군과 만나기 위해서 전국 도처에서 나타났다. 나라 밖에서 보면 이와 같은 상황이 우스운 일면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으며,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억제된 감정이 정치활동의 소용돌이로 폭발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하지 장군과 만날 준비가 된 정당과 사회단체는 150개 이상이나 생겨났다. 그들은 좌익과 우익, 그리고 중간파와 또 그 사이 사이를 대표하며, 거의 모든 색채의 정당들을 대표하고 나섰다. 그것은 건전한 현상이기도 했다. 왜야하면 이 들끓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그때 한국의 주요 정당들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이 박사가 대통령에 지명되고 그가 부통령에 지명된 ‘조선 인민공화국’ 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여 씨가 하지 장군을 만나려고 했을 때 그는 거절당했다. 미군들은 그들 자신의 것 이외에 한국에 있어서 어떤 권위기관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부는 여러 사항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시행할 권위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그를 위해서 시위를 했고, 인민공화국을 지원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은 공산주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느꼈다. 그 반면에 소련은 일본의 적으로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며, 1938년 북한에서 일어난 한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킨바가 있었다. 한국에서 첫 몇 주 동안 미국은 분별없는 행동으로 경원시된 반면 인민공화국은 크게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945년 10월 초에 이르러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 박사가 10월 16일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전보가 왔다. 9월 이래로 침체되었던 민족주의 운동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라도 이 박사를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지명하였었으며 그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10월 16일이 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김포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길을 메웠다. 이 박사는 하지 장군과 미군 의장대를 사열하였으며, 그가 사열대에 올랐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 소리가 군중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것은 40년 동안 계속된 민족의 고난이 끝났다는 것을 고하는 부르짖음이었다. 그것은 구세주가 강림하였을 때 이 세상이 표현할 일종의 종교적 정열과도 같았다.

이 박사는 사열대로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흰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하지 장군에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의 나갈 길을 결정하도록 믿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 상황을 끝맺을 것을 제의했다. 그것은 한국을 두 개의 점령지대로 분할할 분계선을 없애라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 빨리 한국을 떠나고 한국이 평화로운 자체의 정부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바로 그날 그는 여운형 씨에게 자신은 인민공화국이 국민에 의해서 선택된 인정받은 정부가 아니므로 그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11월이 되었으나 긴장되고 혼돈된 상황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한국은 정부를 갖지 못했고, 미국은 아무런 프로그램을 세우지 못했으며, 일본인들은 한국에 있어서의 그들의 위치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는 미군정 관리들에게 그들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모든 지방으로 연설자들을 보내도록 탄원하였다. 나는 미군정 공보처를 매일 괴롭혔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할 권리가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행동을 겁내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전국이 공산당들의 선전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을 때 나는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카이로· 포츠담 선언에 의하여 한국이 독립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한국 국민에게 말해주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의 호응을 독점하리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몇몇 한국인들이 연설자로서 선택되었으나 그들은 한국에 있어서 미국의 의도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올랐으며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달걀과 돌을 던졌으며, 농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내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했다. 나는 지하운동가 중 한 사람인 황현숙 씨와 나의 비서 정주성 씨의 도움을 얻어서 11월 중으로 남한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나는 삼사만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하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강단에서 보냈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호응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미국에 대하여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미국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을 요구했다. 그들에게 세계 상황에 관한 종합적인 개요나 미국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 민주주의 하에서의 개인의 권리 및 종교적 자유 등은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1945 11월, 우리들은 늦게나마 한국을 위한 신탁통치 운운하는 모스크바 결정에 관해서 들었다. 미국, 영국, 중국 그리고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서 5년 동안 합동으로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데 합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한국인에게도 타협할 수 없는 너무나 가혹한 모욕이었다. 위의 4대 강국이 서로 그들의 정치 노선에 따라서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은 두 개 대신에 네 개의 지역으로 분할되며 결과적으로 독립은 의심스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군정 본부에서 신탁통치가 선언된 그날을 기억한다. 나는 하지 장군의 사무실로 갔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이 신탁통치에 관한 합의가 왜 이루어졌지요?” 하고 나는 물었다. “누가 그와 같은 짓을 했소?” “임 여사, 신탁통치는 한국이 동맹국들의 물자와 정신적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뜻할 따름이오.” 하고 말하면서 하지 장군은 그의 푸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장군, 신탁통치가 우리에게 지구상의 한 낙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 궂은 일이 다 포함되는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만일 네 개의 외부 세력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지도된다면 어떻게 우리들이 유엔의 한 책임 있는 성원으로 성숙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소식이 퍼지자 파업이 선언되었다. 어떤 사람이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다. 근로자들은 공장에 가지 않았고, 상정들은 문을 닫았다. 농부들은 논을 떠났으며,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서울 시가를 행진하였다.

수일 뒤에 우리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미 국무장관 번스(Byrnes)가 한국이 원하지 않는다면 신탁통치를 반드시 받은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남한사람들 모두는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며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이 반대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시위에 참여하여, 삐라를 뿌리고, 연설을 하고, 드디어는 반 신탁통치 운동을 위하여 한 대중 집회를 선언하였다. 드디어 한국에는 하나의 국민적 통일이 이루어진 것 같았으며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기꺼이 참여했다.

시위가 시작되는 공원에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붉은 깃발이 펼쳐졌다. 그러나 국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더니 한 공산주의자 연설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친구인 소련을 환영한다. 우리는 근로계급과 빈농들의 조국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으로서 신탁통치 계획을 환영한다!” 군중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서서 야유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그 공원으로부터 몰아냈다.

수일 뒤에 91개의 정치· 사회· 종교 단체들이 천도교당에서 모였다. 결의문이 통과되었는데, 공산당을 민족 반역자로서 낙인찍고 공산주의 지도자 박현영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추운 겨울 날씨에도 밤 2시까지 남아 있었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는 집안에 있는 죽음을 부르는 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일본인과 싸웠듯이 공산주의와 맞대어 싸울 것이었다.

그것은 1946년 정월이었다. 많은 사항들이 한국에서 결정되어지고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관한 최초의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